"나는...... 사람을 죽였어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실수였지만...... 내 몸 하나 지키는 것에만 집중해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아무도 다치지도 죽지도 않고 그 당시를 모면할 어떤 방법이 있었겠지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분노가 뒤따랐고 칼을 빼들었다.
'아가씨 칼은 무겁진 않지만 날카롭습니다. 전투에서는 남자들에게 이기기 어렵겠지만 대련을 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위력적인 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은 실전에서 아가씨가 칼을 잡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지요. 무천이 충분히 아가씨를 호위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믿으세요.'
무오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 나는 무천까지 도망자로 만들었다. 신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국경을 무사히 넘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어머니가 출발하기 전 주신 검은 품 속에 넣었다. 다행히도 그 검이 피를 보진 않았다.
"고구려 국경은 무사히 넘었고 타고 온 말은 발굽을 다쳐 숲에 풀어주었어요. 그 아이의 목숨을 끊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무책임하게 숲에 두고 왔어요. 지금까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렸지만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께서 어린 내가 잠자리에 들면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아주 먼 황금의 땅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난 그 길을 걷게 되는 날이 올거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는데, 지금 어머니의 이야기가 기억나는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면 그 길을 걸어야겠지요. 나의 먼 조상들이 온 길을 되짚어 가다 보면 무엇이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요?"
가슴께에 손을 대보았다. 어머니가 주신 단검이 만져진다. 치마자락 끝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통과 먹을 것을 내려놓는다.
"먹고 힘 내서 이야기해요. 조금 전까지 외계인이 나타나서 납치라도 해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례가 될 지 모르지만 몇 살인가요?"
"열 아홉입니다."
"난 스물 둘이에요."
둥글게 생긴 것을 손으로 잡았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폭신한 질감이다. 한 입 베어 먹었다.
"혹시 우리 둘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거나 아니며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만나게 된게 아닐까요?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현재를 살아가라 이야기하긴 해요. 난 수의사가 되고 싶어요. 공부를 잘 하진 못 하지만, 어쩌면 유급을 하게 돼서 동기들보다 늦게 졸업할 수도 있지만 끝을 보고 싶어요.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고 무능력한 나 자신이 미웠어요. 그렇다고 날 버릴만큼 미운건 아니니까. 난 삼십분 정도 지나면 가야 해요. 오늘 시험이 하나 더 남아있어요.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의지는 아니겠지요? 난 시간이 날 때마다 석탑 아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언제라도 생각이 나면, 아니 가능하면 만나요. 다른 건 못 해도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어요."
달콤하고 부드럽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 했던 그런 맛이 났다. 한 걸음만 옮기면 분홍과 노랑으로 가득한 저 쪽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쪽 세상은 어떤가요? 그럼 지금 공부하는 중인가요? 무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고 그런 과정인가요?"
"네, 우린 모두 학교라는 곳에 다니고 열 아홉 정도에는 앞으로 무엇이 될 지 결정해서 각자 다른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시험을 쳐야 하고 그리고 졸업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렇게 살아가요. 칼은 없어요. 곰도 별로 없어요. 이 주변에 야생동물이 나올만한 숲도 없고, 마법도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