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천은 어떻게 되었을까? 잠결에 본모습은 거칠고 메마른 관목과 키 큰 풀들 사이에서 분노와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선택을 하면 된다. 내가 지친 걸까? 내게 남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할 걸까? 아직 꿈인 건가? 난 어릴 때부터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자주 꾸었다. 아름다운 집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대한 부처님이 멀지만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는 꿈을 꾸었다. 그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절에 다녀오셨다. 아직 내가 꿈속에 있다면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저분은 내 앞날의 어떤 징조를 나타내는 걸까?
"약리학 시험이 너무 힘들었어요. 아무리 외우려 해도 외워지지 않았어요. 밤을 새우고 아침이 다가오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유급하는 것이 아닐까? 유급하면 부모님께 뭐라고 말하지? 친구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하지만 아주 조금 정말 외워지지 않는 것들을 적어서 시험장에 들어갔어요. 제가 적어간 것들은 시험에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조교님에게 쪽지를 들켰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쪽지만 들고 갔어요. 주변에 아무도 보지는 못 했을 거예요. 우리 학교는 부정행위가 걸리면 유급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어떻게 될까요? 유급당하면 내년에 복학할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남아있는 시험은 쳐야 해요. 어쩌면 조교님이 모른 척해 주지 않으실까요? 차라리 교수님이 절 불러서 넌 유급이야! 땅! 땅! 이렇게 해 주시면 좋겠어요. 잠도 안 오고 자꾸 눈물만 나고 차라리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옆에서 나즈막한 소리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거겠지요? 며칠 잠을 못 잤어요. 오전에 시험이 하나 있어서 어젯밤에는 울며 공부했거든요. 그리고 여기로 왔어요. 이곳은 피난처 같은 곳이에요. 박물관 뒤에 늘어선 석탑 중 하나예요. 뒤쪽에 앉으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아요. 외롭다거나 슬플 때는 여기서 석탑 위로 흔들리는 수양버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아요. 수양버들 잎 하나하나가 제게 넌 좋은 아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거든요."
"아침도 안 먹고 나와서 빵 하고 커피를 샀어요. 커피는 깨어있으려고 마셨지만 빵은 아직 뜯지 않았어요. 혹시 이 빵 드실래요? 가방에 물도 하나 있어요. 지금은 꿈이라도 당분간은 깨고 싶지 않아요. 왠지 그쪽이 편안해요. 내 이야기는 했으니까 그쪽도 이야기해 줄래요."
바스락거리며 만지던 투명한 종이에 쌓여 있는 것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 같은 긴 통을 가방에서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제가 뜯어드릴게요. 물도 열어드릴게요. 누군가 제 모습을 본다면 중간고사 기간에 정신줄 놓은 애라고 생각할 거예요."
투명한 종이 속에 동그란 갈색 덩어리를 내게 다시 내밀었고 오른손으로 받아 들었다. 햇살에 반짝거리며 찰랑이는 물통도 왼손으로 받았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래 이건 꿈이구나. 이런 날씨에 오래 잠이 들면 죽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깨고 싶지 않다.'